임진강을 건너온 역사(11) 고을 수령들이 찾은 임진강 (3) 칠중하, 깐깐한 선비의 잠깐 나들이.
수정 : 2022-11-15 00:28:28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11) 고을 수령들이 찾은 임진강
(3) 칠중하, 깐깐한 선비의 잠깐 나들이.
△감악에서 본 임진강. 적성은 임진강과 감악산의 고장이다.
임진강은 이천에서 이수가 되고 연천에 이르면 연강이 된다. 연강을 지나면 구연강, 신지강, 술탄, 호로탄이 되는데 이곳을 아울러 칠중하라고 한다. 칠중성 앞을 흐르는 강이란 의미다. 칠중성은 파주 적성의 옛 이름이다. 감악산과 임진강 사이에 첩첩이 쌓여 있는 고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초기 문신 서거정은 적성현에 대해 “토지가 편벽되고 민물이 잔약하여 요역을 능히 바치지 못하니, 수령된 자가 죄다 걱정하였다.”고 쓴다. 그 만큼 외진 고을이다. 동시대 김반의 글도 비슷하다. “동쪽으로 감악 높은 산을 기댔고, 서쪽으로 장단부 큰 강을 눌렀다. 지역이 가장 궁벽하고 좁아서 백성의 삶이 가난하였다.”고 기록한다. 다른 이들이 본 적성도 다르지 않다. 이 고을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로지 감악산과 임진강이다. “감악이 반공에 떴고, 암성은 물가에 임했다.(함부림)”거나 “산이 높으니 구름이 멧부리에서 나오고 들이 끝난 곳이 물가로 되었다.(권제)”는 식이다.
감악산에 오르면 위로는 웅연에서 흘러오는 연강이 눈에 들고, 아래로는 한강하구 교하가 멀리 펼쳐진다. ‘산하’, ‘산천’이 한 단어인 것을 여기서 실감한다. 산은 강을 떠밀고, 강은 산을 휘돌며 서로를 결속한다. 임진강 상류가 마식령의 강이라면 하류는 단연 감악의 강이라 할만하다.
△적성의 임진강과 감악산. 이덕무가 배를 띄운 곳은 이쯤일 것이다
1784년 7월, 이 궁벽한 고을에 서책을 잔뜩 짊어진 선비 한 사람이 현감으로 부임한다. 규장각 초대검서관으로 당시 임금 정조의 문화사업에 일조하던 인물. 정조는 수시로 규장각에 불러올리려는 계산으로 이 사람을 서울 가까운 고을의 수령에 임명한다. 규장각 4검서 중 한 사람 이덕무다. 그는 5년을 적성에 머물며 지방관으로서도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이덕무는 관아 일과 검서관 일을 함께 하느라 한가할 틈이 없었다. 부임과 동시에 중국역사서 ‘송사전’ 개정 작업에 몰두한다. 조선의 법령을 통합한 ‘대전통편’ 교정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후에는 ‘무예도보통지’와 ‘해동읍지’ 편찬에 참여한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게 되자 왕이 나서 검서관 일을 줄여줄 정도였다. 이덕무 연보는 이 시기를 날짜 별로 깨알 같이 기록한다. 5년 부임기간 중 한가로운 나들이는 서너 차례에 불과했다. 감악산 자락 청학동에 정자를 지어 놓고 가끔 찾아가 바람을 쐰 것이 전부였다. 촘촘한 일정 중에 1785년 5월5일 임진강에 나간 하루가 눈에 띈다.
“신지강에 배를 띄우고 물고기를 구경하였다. 이 강은 적성현의 북쪽에 있다. 아들 광규와 김군 재운이 함께 갔다.(이광규. 「이덕무 연보」 중에서)”
신지강은 적성 율포리 앞 임진강이다. 감악산이 눈앞에 보이고, 적벽이라 부르는 용암절벽이 펼쳐진 경승지다. 여기를 다녀온 뒤 남긴 것이 ‘泛舟神智江觀魚’, 물고기를 구경하였다는 덤덤한 한마디뿐이다. 일에 빠져서 산천경개에는 관심이 없었을까?
아들이 쓴 유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선군께서 현아에 계시면서 현지를 수찬하되 효열, 고적을 널리 찾아내어 매우 세밀하게 서국에 보내니, 서국의 사람들이 감탄하기를 ‘우리나라 주군이 3백 여가 되는데 <적성현지>처럼 상세한 것은 없다.’ 하였다.”
그는 현감으로 있으면서 규장각 일 뿐 아니라 고을 적성의 현지를 보충 편찬한다. 현지는 지리서지만 고적, 형승, 산천, 제영 등 자연과 문화, 인물을 망라한 저작이다. 그는 고을 곳곳을 샅샅이 찾아 정보를 담았다. 조정에서 감탄할 정도였다니 노력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 그가 5년을 머문 고을에 대해 따로 남긴 것이 없는 것은 의외다. 임진강이 엿보이는 몇 편의 시에도 개인적인 정념보다는 관리로서 갖는 자세가 더 드러난다.
△적성향교. 적성 옛 고을 구읍리에 있다
“보슬비 단조역부터 내리기 시작하고/ 사라지는 무지개는 자지촌에 꽂혀 있네/ 무더위에 백성 수고 응당 많으니/ 사립문 앞에서 들 늙은이 얘기 듣네.(이덕무. 「들을 바라보며」 부분)”
문장가인 그가 한 편의 감상이라도 남겼다면 임진강에 소중한 자산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만 하다 갔다. ‘泛舟神智江觀魚’ 한 마디만 남긴 채.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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